노동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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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인쇄소‧식당‧아파트’를 누비는 사람들

우리 동네에 수상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인쇄소 골목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캐묻는가 하면, 각종 화학물질의 보관상태 등을 살피고 다닌다. 이건 이래서 안 된다, 저건 저래서 위험하다며 잔소리까지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며칠 뒤, 그들은 뚜껑 달린 은색의 둥근 알루미늄 통을 들고 다시 찾아왔다. 마치 쓰레기통처럼 생긴 저것은 어디에 쓰는 물건일까?‍

우리 동네 ‘인쇄소‧식당‧아파트’를 누비는 사람들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재)일환경건강센터에서 대외협력·교육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소규모사업장 및 안전보건 사각지대 노동자의 안전보건 수준 향상을 위해 '산업보건 전문가'로 일하면서, 노동자 직업건강 문제를 다루는 다양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

‘화학물질 범벅’ 작은 인쇄소

충북 청주에 위치한 공익재단 일환경건강센터는 노동자와 자영업자를 포괄하는 ‘일하는 모든 사람’의 직업건강 증진을 위해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부문 산업보건센터다. 주로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을 대상으로 직업건강 프로그램과 작업환경개선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일환경건강센터가 진행한 ‘작은 인쇄소 폐걸레함·소분용기 지원사업’은 소규모 사업장 사업주와 노동자를 위한 직업병 예방사업 가운데 하나다.

인쇄업은 대표적인 도심 속 영세 제조업이다. 고용노동부의 사업체노동실태현황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국의 ‘인쇄 및 기록매체 복제업’ 사업체는 9천498곳, 종사자수는 5만6천64명이다. 5인 미만 사업장 비율이 66.2%로 가장 높고, 5인 이상~9인 이하 사업장 비율이 21.2%로 뒤를 잇는다. 전체 사업장 10곳 중 8곳 이상이 소규모 사업장이다.

영세성은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초단기 납품 관행에서 비롯된 빈번한 철야작업과 주야 맞교대 근무형태, 시너·톨루엔·크실렌 같은 유해 화학물질의 사용, 작업장 내 소음 등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가 즐비하다. 하지만 대대적인 작업환경 개선을 추진하기도 쉽지 않다.

    

“내 돈 들여 국소배기장치 같은 안전보건설비를 교체하기가 쉽지 않아요. 마음은 굴뚝같은데 먹고살기가 힘드니까요. 예전에 설비를 바꿔 보려고 알아봤는데, 낙후된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처지라 공사 자체가 쉽지 않더라고요.”(○○인쇄소 사장님)

    

일환경건강센터가 작은 인쇄소에 나눠 준 폐걸레 수거함 (사진출처 : 재단법인 일환경건강센터)

이 같은 현실적 제약은 일환경건강센터가 ‘작은 인쇄소 폐걸레함·소분용기 지원사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 됐다. 작은 인쇄소들을 상대로 종합적인 환기대책을 제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센터는 인쇄소 내 유해 화학물질의 보관과 처리에 주목했다.

먼저 인쇄설비에 묻은 각종 화학물질을 닦아내는 폐걸레가 방치돼 사업장 환경을 오염시키는 문제를 줄여보고자 뚜껑이 달린 폐걸레 수거함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또, 빈 깡통이나 음료수병에 대충 담아 사용하던 화학물질을 필요한 만큼 나눠 쓸 수 있도록 소분용기를 배포하고, 해당 화학물질의 독성과 건강영향을 표기한 스티커를 배부했다.

‘조리흄 위험지대’ 동네 식당

인쇄소 골목을 지나 이번에는 식당 골목이다. 20년 넘게 영업 중인 △△치킨집으로 가보자. 테이블 하나 겨우 들어가는 작은 홀, 튀김기와 싱크대가 전부인 주방에서 부인은 닭을 튀기고 남편은 배달하며 생계를 이어 왔다.

    

“학교급식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폐암에 걸렸다는 뉴스를 봤어요. 남 일 같지 않더라고요. 온종일 기름연기 속에서 일하다 보니까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려요. 정부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폐암 검사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치킨집 사장님)

    

먹고 사는 일의 비애는 이들 부부의 몸에도 흔적을 남겼다. 끓는 기름에 덴 화상자국, 튀긴 닭의 기름을 털어내다 생긴 팔꿈치 통증, 온종일 서서 일하다 도진 허리 통증…. 여기에 배달 중 교통사고 위험이나 진상손님에게 받는 스트레스도 몸과 마음을 멍들게 한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2021년 학교급식 노동자의 폐암이 산재로 승인된 후 2023년 10월까지 117명이 산재로 인정됐다. 주로 튀김요리를 다루는 중국음식점 주방장 등을 대상으로 진행된 선행연구에 따르면, 고온의 튀김·볶음·구이요리에서 발생하는 조리흄(Cooking Fume)에 지속 노출되는 업무의 특성과 폐암 등 질병 발생 사이에 연관성이 높다.

그런데 학교급식 노동자와 달리, 동네 식당 노동자 건강 문제는 사회적으로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유가 뭘까. 차이는 문제를 제기한 주체에 있다. 학교급식 문제는 ‘노동조합’이 노동자 건강 문제를 주도적으로 제기한 대표 사례다. 반면 동네 식당의 경우 대리인을 찾기 어렵다. 동네 식당에 폐암 환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동네 식당 노동자 건강에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환자를 찾아낼 만한 조직이 없다는 게 문제다.

△△치킨 주방에 일환경건강센터가 새로 설치한 국소배기정치 (사진출처 : 재단법인 일환경건강센터)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일환경건강센터가 ‘외식업 종사자 환기시설 개선사업’에 나섰다. 영세한 동네 식당의 유해물질 노출수준을 평가해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고, 작업환경 개선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하자는 취지다.

유해환경으로부터 노동자 건강을 보호하려면 대치·격리·환기가 필요하다. ‘대치’는 작업장의 유해물질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덜 해로운 물질로 대체해 노출 원인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격리’는 작업자와 유해인자 사이에 물체·거리·시간 같은 물리적 장벽을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기름 없이 닭을 튀길 수도 없고, 사람 한두 명 겨우 지나다니는 주방에 물리적 장벽을 두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환기’ 설비 교체는 이런 사정을 고려한 현실적 선택이다.

아픈 사업장 고치는 ‘일터주치의’

식당 골목을 지나 이번엔 동네 아파트 관리사무실로 가보자.

    

“어르신들 숙제 내드린 거 잘 해오셨어요? 지난번 방문했을 때 근골격계 유해요인 조사표 어떻게 작성하는지 설명해 드렸는데. 설마 그새 다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일환경건강센터 산업간호사)

    

간호사 선생님의 기습질문에 일동 묵묵부답이다. ‘그런 숙제가 있었던가?’ 하는 표정과 함께. 이날은 일환경건강센터의 ‘일터주치의’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다. 일터주치의는 정보나 예산이 부족해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나 열악한 작업환경을 방치하고 있는 영세사업장을 돕자는 취지로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사업장 컨설팅에서 사후관리까지 전 과정이 논스톱으로 이뤄진다.

센터는 아파트 경비원들의 잇단 자살사건을 계기로 아파트 고령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용역‧도급 같은 중층적 고용관계에서 빚어지는 고용불안과 중간착취 문제, 입주민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갑질’ 문제, 경비직 24시간 맞교대 근무에 따른 피로도 증가 등이 어르신들의 정신건강과 신체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일환경건강센터가 일터주치의 프로그램을 진행한 □□아파트 관리사무소 (사진출처 : 재단법인 일환경건강센터)

센터는 □□아파트 고령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총 3년에 걸쳐 일터주치의 사업을 진행했다. 노동자를 직접 만나 혈압‧혈당‧콜레스테롤 간이검사를 진행하는 등 전반적인 건강상태를 체크했다. ‘골병’으로 불리는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개별상담과 직무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전문가 심리상담도 진행했다.

일환경건강센터는 청주 일대 아파트 관리소장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인사다. 아파트 관리소장 단톡방에는 “이번에 어디 아파트가 일터주치의 프로그램을 받았는데 반응이 좋더라”는 입소문이 순식간에 퍼진다. 일터주치의는 단순한 직업건강 프로그램이 아니다. 위험을 보는 눈을 키우고, 일터 안전과 노동자 건강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자생력’을 높여주는 것이 이 사업의 궁극적 목표다.

산재노동자 10명 중 6명은 ‘작은 사업장’ 소속

일환경건강센터가 작은 사업장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곳이 노동자 안전보건의 사각지대이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의 2022년 산업재해 현황분석에 따르면 50인 미만 사업장 소속 산업재해 피해자 비율이 69.9%에 달한다. 산재를 당한 노동자 10명 중 7명 꼴이다. 산업재해율은 종사자 규모에 반비례하는 특성을 보인다.

그런데 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업종·지역·고용관계·노동조건·작업환경의 차이가 크고 ▲안전보건에 투여할 자원이 없고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동시에 자체적인 안전보건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안전보건 규제와 지원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높고 ▲법적 준수사항을 요식행위로 간주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산업보건 전문기관이 소규모 사업장의 안전보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이유다.

일환경건강센터는 전문인력 등 가용자원을 바탕으로 다양한 맞춤형 서비스를 개발하고, 이를 필요로 하는 소규모 사업장을 직접 찾아 나서고 있다. 센터의 공익활동에 함께하고자 하는 기관‧단체‧사업장은 전화(043-904-7411)나 이메일(center@cweh.org)로 문의하면 된다. 보다 건강한 사회,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일터를 위한 일환경건강센터의 ‘행복한 동행’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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