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의미 있고 보람되며 고임금일수는 없다. 그러나 안전하게 일할 수 있고, 권리를 차별 없이 보장받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나라의 법과 제도는 약자일수록 가혹하게 설계되어 있다. 이러다 보니 일하는 국민 중 절반에 해당하는 50.2%가 노동관계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최혜인
금속노조법률원 노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직장갑질 119에서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 대안제시를 위한 연구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2024년 4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67%의 투표율로 32년 만에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투표율은 국민의 정서를 반영합니다. 2008년에 있었던 18대 총선 투표율은 46.1% 밖에 되지 않습니다. 당시에 유권자 절반도 참여하지 않은 결과가 과연 대표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는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론까지 등장했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후부터 지금까지 쭉 투표율이 올랐고, 이번 22대 총선에서 유권자 2/3이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2013년부터 사전 투표가 도입됐고 투표 시스템이 전산화되는 기술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투표장까지 접근성이 개선되고 대기시간이 줄어들면서 투표에 참여하기가 훨씬 편리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 ‘시끄러움’이 투표율 상승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합니다. 시끄럽다는 것은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는 다중적 의미입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는 큼직한 정치적 사건들을 겪었습니다. 시끄러운 정치적 사건들은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하는 동기가 된 듯합니다. 이처럼 물오른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22대 총선은 시민들의 바람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거라 기대됐습니다. 그러나 총선에 앞선 각종 여론조사 결과들은 엎치락 뒤치락하는 역동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노동정책에 대한 요구는 꽤나 일관적이었습니다. 노란봉투법,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 근로시간 단축 등이 대표적입니다. 22대 총선에서 과반 이상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은 비정규직 차별 금지, 근로시간 단축, 고용안정망 강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민주노총의 정책질의 중 노란봉투법,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 비정규직 고용안정 등에 동의했습니다.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은 민주노총의 정책질의에 답변하지 않았지만 노동공약으로 육아휴직 급여 인상, 육아기 유연근무 지원 등 저출생과 관련된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이처럼 정당별로 우선순위에 차이는 있지만, 고용불안, 장시간 근로, 그로인한 저출생 현상이 22대 총선의 화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단체 <직장갑질119>가 조사한 “22대 국회가 직장인들을 위해 추진해야 할 최우선 노동정책”에서도 이와 유사하면서 더욱 구체적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직장갑질119>의 조사는 2024.5.부터 2024.6.까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22대 국회가 직장인들을 위해 추진해야 할 최우선 노동정책 7가지 제시한 후, 필요성에 대하여 ‘매우 필요하다’부터 ‘전혀 필요하지 않다’까지 4점 척도로 응답하게 했습니다. 선택지로 제시한 노동정책은 <직장갑질119> 스탭으로 활동하는 노무사, 변호사를 대상으로 한 ‘2024년 직장인에게 꼭 필요한 공약’ 투표 결과를 기반으로 선정했습니다. 조사 결과, <직장갑질119>가 제시한 7개 노동정책에 ‘필요하다’라고 응답한 직장인 비율은 최소 75.8%에서 높게는 87.3%로 전반적으로 매우 높게 나타났습니다.
1위 [체불임금 지연이자제 모든 임금 체불에 적용]
근로기준법은 체불임금에 대한 지연이자제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근로기준법 제36조에 따르면, 근로자가 퇴직한 후 14일 이내에 사용자는 임금과 퇴직금 등 모든 금품을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합니다. 14일을 초과하여 지급할 경우, 근로기준법 제37조 제1항 및 근로기준법 시행령 제17조에 따라 연20%의 지연이자가 부과됩니다. 상법상 법정이율은 연6%인데 반해, 근로기준법이 그보다 높은 이율을 설정하고 있는 것은 임금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취지입니다.
문제는 지연이자제도가 퇴직한 근로자의 임금에만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근로기준법 제43조 제2항은 매월 1회 이상 일정한 날짜를 정해서 임금을 지급할 것을 정하고 있습니다(정기불 원칙). 때문에 재직 중인 근로자의 임금이 체불됐을 때는 정기불 원칙 위반으로 노동청에 신고할 수 있고, 사용자는 형사처벌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재직 중인 근로자가 사용자를 임금체불로 고소하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계속 회사에 다닐 생각이라면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임금을 늦게 지급할수록 사용자는 이득을 보는 구조입니다. 그러다 보니 [체불임금 지연이자제 모든 임금 체불에 적용]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직장인이 87.3%에 달합니다.
2,3위 [5인 미만, 특수고용 등 모든 노동자에 대해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과 [일하는 모든 사람 고용보험 가입]
근로기준법 제11조는 '근로기준법은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장에 적용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고용보험법 제8조는 '고용보험법은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장에 적용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근로기준법과 고용보험법은 근로자를 위한 법입니다. 근로자란, 임금을 목적으로 사용자에게 종속되어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는 법과 판례가 정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고용관계가 다양해지면서 근로자와 마찬가지로 일을 해서 보수를 받지만, 외관상 근로자가 아닌 것으로 둔갑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보험설계사, 학습지교사, 택배배달원, 건설기계운전원, 화물차운전원, 골프장캐디 등 특수고용노동자가 대표적 사례입니다. 최근 늘어나고 있는 배달, 심부름, 대리운전 등 플랫폼을 사용해 일하는 플랫폼노동자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일해서 받은 보수로 생활한다는 점에서 근로자와 다를 게 없지만, 고용계약 형식이 전통적인 근로계약이 아니라는 이유로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평가받으며 노동관계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최저임금, 연차휴가, 직장 내 괴롭힘 등에서 배제되어 있고 4대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실업급여, 육아휴직, 산업재해, 국민연금 등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에서도 배제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로자에 해당하더라도 5인 미만 사업장에는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작은 사업장의 지불능력과 정부의 관리감독 역량의 한계가 배제의 논리입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5인 미만 사업장에 종사하는 근로자는 382만 9천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17.5%입니다(2023년). 작은 사업장에 일한다는 이유로 근로기준법의 기본적인 보호에서 배제되는 것은 과도한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반영된 듯, 설문에 응답한 직장인의 83.9%가 [5인 미만, 특수고용 등 모든 노동자에 대해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이 필요하다고 응답했고, 82.2%가 [일하는 모든 사람 고용보험 가입]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습니다.
4,6위 [노동시간 단축 및 연장근로 상한 설정]과 [포괄임금제 전면 금지]
한국은 오래 일합니다. OECD에 따르면 한국 근로시간은 연평균 1901시간으로, OECD 38개 회원국 중 네 번째로 깁니다(2022년). 근로기준법 제50조는 하루 8시간, 1주 40시간을 법정근로시간으로 정하면서 근로기준법 제53조에 따라 1주 12시간 한도로 연장근로를 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연장근로를 할 경우 통상임금의 50%를 가산한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용자에게 금전적 부담을 가함으로써 연장근로를 억제하고, 연장근로로 인해 휴식권이 제한된 근로자에게 이에 상응한 금전적 보상을 하라는 취지입니다. 그러나 탄력적근로시간제와 특별연장근로 등으로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한 연장근로가 가능하고, 포괄임금제로 장시간근로가 유발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근로시간을 제한한 법의 취지와 달리, 현실에서는 근로자에게 적절한 보상도 없이 장시간근로를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은 과로사, 과로자살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몇 안 되는 나라입니다.
직장인 81.8%가 [노동시간 단축 및 연장근로 상한 설정]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습니다. 장시간근로는 근로자를 병들게 합니다. 이대로는 밥 한 끼 직접 해먹을 시간도 없고, 운동할 시간도 없습니다. 과로사회는 개인의 피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서로에게 불친절하고, 못마땅한 기분이 들면서 모두를 지치고 힘들게 합니다. 이런 삶은 재충전은 물론 재생산도 어렵게 합니다.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저출생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보편적인 [노동시간 단축과 연장근로 상한 설정]으로 과로사회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합니다. 그 효과가 담보되려면 [포괄임금제 전면 금지]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5,7위 [사용자와 노동자의 범위를 확대해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강화하는 노조법 2조 개정]과 [상시지속업무 비정규직 사용 금지]
최근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리튬배터리 공장 아리셀에서 화재가 일어나 23명이 사망했습니다. 언론보도를 토대로 추정컨대, 사망자 23명 대부분은 파견 또는 근로자공급 등에 의한 간접고용 비정규직으로 보입니다. 간접고용이란 근로계약을 맺은 사용자와 업무를 지시하는 사용자가 불일치하기 때문에 근로자의 안전, 휴가, 임금, 직장 내 괴롭힘 등 전반에 있어서 누가 사용자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지 불명확해지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파견, 하청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때문에 실질적인 권한이 있는 자까지 사용자 범위를 확대해 근로조건과 노동환경에 대해서 직접 교섭하고 책임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2023년 노란봉투법이라 불리는 노동조합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결국 입법이 무산됐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직장인들의 81%는 [사용자와 노동자의 범위를 확대해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강화하는 노조법 2조 개정]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습니다.
더 나아가 직장인 75.8%는 [상시지속업무 비정규직 사용 금지]가 필요하다고 응답했습니다. 상시지속업무란 말 그대로 상시적이고 지속적으로 가동되는 업무를 말합니다. 반대로 직원의 휴직으로 일시적으로 공백이 발생한 업무, 프로젝트성 업무로 프로젝트 기간동안만 가동되는 업무는 상시지속적 업무가 아닙니다. 이처럼 일시적인 업무에는 기간제근로자와 같은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 업무가 아닌 상시지속적 업무에는 정규직을 채용해 일자리 안정성을 높이자는 것이 이 정책의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근로자에게 고용불안은 삶에서의 불안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은 [상시지속업무 비정규직 사용 금지]가 필요하다고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직장인들은 임금체불, 장시간노동, 비정규직 문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체감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노동시장의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개선이 필요하지만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모를 정도로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입니다. 노동정책 필요성에 대한 직장인들의 압도적인 찬성률은 22대 국회가 지금이라도 발빠르게 움직여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언급한 7개 노동정책 중 4개는 이미 국회에 발의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3개도 과거에 발의됐다 폐기된 법안들입니다. 주요 노동정책이 줄줄이 폐기되지 않도록, 22대 국회가 직장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