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의미 있고 보람되며 고임금일수는 없다. 그러나 안전하게 일할 수 있고, 권리를 차별 없이 보장받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나라의 법과 제도는 약자일수록 가혹하게 설계되어 있다. 이러다 보니 일하는 국민 중 절반에 해당하는 50.2%가 노동관계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한상진
민주노총 경기지역본부에서 정책국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우리사회 노동에 대한 다양한 문제제기와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22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연 노동시간은 1,901시간으로 한국보다 노동시간이 긴 나라는 2,405시간의 콜롬비아와 칠레, 멕시코, 코스타리카가 있다. 이웃한 일본의 노동자들은 일 년에 1,607시간을 일한다. 한편 독일의 노동자들은 연평균 1,341시간을 일한다. 무려 한국의 노동자들이 독일의 노동자보다 연평균 560시간을 더 일한다. 이렇게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개인의 존엄과 자주성을 지키고 실현하기 위한 여가와 취미 나아가 결혼과 출생은 언감생심이다. (물론 결혼과 출생은 개인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지 필수요 의무는 아니다). 정부는 낮은 출생률 극복을 위해 출생장려금을 중심으로 이러저러한 대책을 내놓지만, 현재 이것이 성공하리라 믿는 이는 거의 없다.

노동시간 단축은 현재 겪고 있으며 또 다가올 미래의 충격을 해결하고 우리 사회의 대전환을 이룰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단순히 노동시간을 줄이는데 그치지 않고 기후위기 대응, 불안정 노동 규제, 기형적인 임금체계 해소, 허술한 사회보장제도 강화, 사회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는 비정규직과 작은 사업장 노동자의 기본권 신장 등과 함께 추진될 때 사회변화와 발전의 토대로 작용할 수 있다.
기후위기와 이에 대응하는 산업 구조·질서의 재편은 큰 화두이며 당면한 시급한 과제다. 이에 대한 적절하고 적극적인 대응이 시민의 삶을 좌우할 것이라는 점에 대한 이견은 없다. 특히 이 과정에서 벌어질 실업과 고용문제는 심각하다. 관성적인 대책을 넘어 근본적 대책 수립이 필요하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기후위기 대응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논의될 수밖에 없는 일자리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작년 주 52시간 연장근로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활발할 때 재계와 사용자단체는 ‘연장근로가 제한되면 임금이 줄어들어 현장의 노동자들이 반대한다’는 논리를 들고나오며 오히려 노동시간 연장을 주장했다. 이는 왜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몸을 갈아 넣는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인에 대해선 말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을 왜곡한 결과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기에는 부족한 낮은 임금과 모순적인 임금구조에서 기인한다. 저임금 노동자의 비중이 최근 줄어들고 있다고 하지만, OECD 회원국 사이에서는 여전히 높은 편이며, 월 임금 기준으로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또한, 기본급의 비중이 낮고 연장, 특근 등의 수당이 과도하게 높은 임금구조에서 노동시간의 단축은 임금 감소로 직결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정 임금보장과 비정상적 임금체계를 바로잡는 것이 함께 가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일부 시장 임금의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보완할 것인가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시장 임금만으로는 천정부지로 뛰는 물가와 대출 금리, 부동산 가격과 과도한 의료비와 교육비, 수도광열비, 교통비를 감당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주택과 교육과 의료, 교통, 보육을 국가가 책임지거나 많은 부분 감당함으로써 여기에 들어가는 개인의 비용을 줄여야 한다. 이래야만 혹여 노동시간 단축으로 수령 임금이 줄어들어도 복지의 확대로 이를 상쇄해 삶의 전반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노동시간 단축은 이처럼 사회보장시스템의 강화와 함께 논의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또한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시간 양극화, 즉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는 노동자’에게 적정 노동시간을 보장하는 대책과도 함께 가야 한다. 급증하고 있는 (초)단시간 노동 규제, 부족한 노동시간으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불안정 노동자에게 예측 가능한 최소 노동시간 보장 등 노동시간 자율성을 보장하는 조치가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강구되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이 제대로 실현되고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적절한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정임금 보장, 불안정 노동자에게는 최소 노동시간 보장, 사회보장제도 강화, 비정규직과 작은 사업장 노동자 권리 보장 등이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시간만을 단축하는 방향으로 추진될 경우, 현재 우리 사회에 구조화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